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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투쟁_book 외로운 투쟁_html 외로운 투쟁_txt
실물 '자서전 외로운 투쟁' 책과 '시집 한탄' 책을 모든 사람들에게 배부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웹페이지를 통해서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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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권의 책은 여래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집필한 글입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여래일 것이라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이삼한 시절의 글입니다. 단 한 번도 깨닫거나 여래가 되겠다는 시도를 해 본 적이 없던 이삼한 시절의 글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삼한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고 여래로 출현하였습니다.
자서전「외로운 투쟁」을 두고 여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 대해 궁금하거나 나의 깨달음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면 된다. 또 자신이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면 된다.”
이삼한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며, 그가 어떻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고 여래로 출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그 의문을 풀고 싶은 분이 있다면, 이 두 권의 책을 읽어보시면 속 시원하게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귀하께서 상급 분류에 속하는 분이시라면,
글쓴이는「외로운 투쟁」과 「한탄」책을 1992년 3월에 처음 받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외로운 투쟁」380페이지,「한탄」145페이지,「나그네」130페이지를 이번에 「외로운 투쟁」「한탄」「나그네」「깨달음」책의 원문을 재교정하고 이 4권의 책 중에서 「깨달음」소개서는 기안(起案)부터 초안·교정·편집·발행까지 그리고 「나그네」내용은 그동안 50~60번 정도는 보고 읽었을 것입니다. 「외로운 투쟁」내용은 그동안 20~30번 정도는 보고 읽었을 것입니다. 「한탄」내용은 그동안 10~20번 정도는 보고 읽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다시「외로운 투쟁」과 「한탄」을 편집하면서 몇 번을 또 읽게 되었습니다. 「외로운 투쟁」과 「한탄」을 읽을 때마다 한 번 읽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새로이 알아보게 되는 이삼한의 실상을 통하여 여래가 시집「나그네」에서, 세상에서의 다섯 가지 축복 하나는 회개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기도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섬기는 마음이요. 하나는 그 뜻을 전하는 마음이다.
글쓴이의 의식수준으로는 이제 겨우 「회개하는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외로운 투쟁」·「한탄」·「나그네」·「깨달음」 이 네 권의 책을 제대로 소개하기에 앞서서 글쓴이 제가 과연 인간들이 쓴 수많은 책들과 그 모든 내용들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간략하게 설명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글쓴이는 한글을 읽게 되었을 때부터 밥상 밑에 책을 펴놓고 읽으면서 밥을 먹는 아이였습니다. 밥상머리에서 밥 먹는 시간보다 책 보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 야단도 많이 듣고 머리에 책 얹고 벌도 섰습니다. 초등학생 5~6학년을 교내 도서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문학전집, 위인전, 우리나라역사, 동화와 고전, 탐정소설 등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거의 대부분 읽었습니다. 도서관 도서구입을 핑계로 남포동 문우당서점, 부전동 청학서점에 가면, 책장에 꽂혀있는 책은 분류에 상관없이 시간제한 없이 무작정 읽었습니다. 글쓴이는 중·고등학생 시절을 모회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했으므로, 학교를 다녀오면 바로 사무실에서 잡무를 했습니다.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이 없는 덕분에, 사무실에 배달되는 조간 동아일보·한국일보, 석간 부산일보·국제신문을 정치·경제·사회면뿐만 아니라 연재소설까지 모두 읽었습니다. 한자(漢字)는 신문을 읽는 동안 저절로 모두 깨쳤습니다. 사무실에서 구독하는 월간잡지 신동아·여성동아·주부생활도 낱낱이 읽었습니다. 어쩌다 은행에 심부름을 가면 객석에 비치된 신문·월간·주간잡지를 전부 읽어야 나왔습니다. 가끔 시내 서점에 들르면 신간을 제외하고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었습니다. 한국·세계 장·단편문학은 기본이고, 천문학·양의학·한의학·건축·공예등 관심이 가는 기술서적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보수동 헌책방 가게에 가면 책을 사지도 않으면서 읽기만 하는 녀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한 권을 구입하는 척하면서 열 권 스무 권을 읽으며 헌책방도 모두 거쳤습니다. 결국 부산시립도서관까지 모두 섭렵하고 나니 중·고등학생 신분으로는 더 이상 가볼 곳이 없었습니다. 짧은 머리였던 고등학생에서 머리를 기르는 사회인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대학교 도서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학교 도서관에도 마땅하게 읽을 책이 없었습니다. 서울 국립중앙도서관과 교보문고, 종로서적을 찾아갔지만 별 다르지 않았습니다. 글쓴이의 글 읽는 방식은 다독(多讀)과 속독(速讀)입니다. 그리고 무분류(無分類)입니다. 길거리 간판·광고부터 부적·주문(呪文)까지, 수수께끼 책부터 백과사전까지, 음악·미술부터 고우영·강철수의 만화까지, 종교·철학부터 안동민의 심령과학까지, 도대체 읽지 않는 분류가 없는,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모조리 읽었습니다. 1991년 8월 17일, 글쓴이가 여래를 처음 만났을 즈음, 제가 소장했던 서적들은 등산 관련 월간지와 전문서적들 그리고 국내외 산악인들의 단행본들이 주종이었습니다.
글쓴이는 네 권의 책 중에서 제일 먼저「나그네」를 1991년 6월에 처음 만났습니다. 책 제목이 하도 놀라워서(이유는 따로)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중간쯤을 살짝 펼쳤는데 교훈 한 사람의 죄 없는 이를 죽인 자들은 그 자손들로 하여금 6백만 명의 목숨을 바치게 했다.
저는 글을 보자마자 바로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책「나그네」를 보고, 이 글을 읽기 전에, 얼마나 많은 책과 글을 읽어 보았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 글과 유사한 글이나 내용을 본 적이 있는지, 유사한 표현이라도 본 적이 있는지, 도저히 제 머릿속에서는 어떤 자료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글쓴이는 네 권의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투쟁」·「한탄」·「나그네」·「깨달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읽었다 해도 이 네 권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귀하는 결코 아직까지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귀하께서 이 네 권의 책을 읽어 보신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책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귀하는 기필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책이라도 펼쳐보는 순간 그 내용의 진실에 대해 바로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단단히 소개를 드려도 읽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번 쯤은 읽어봐도 크게 손해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연히 시간이 나서 한 번 쯤 읽어 보았는데, 그 일이 자기 자신에게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주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양식이 되는지 누가 아니라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삼한에 관해서, 여래에 관해서, 글쓴이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로부터도, 인터넷의 어떤 사이트로부터도, 이삼한과 여래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은, 귀하께서 알고자 하는 정확한 해답을 얻게 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더 맞습니다. 그러므로 이삼한과 여래에 관해서 틀리지 않는 내력을 알고 싶은 분은 「외로운 투쟁」「한탄」「나그네」「깨달음」책 4권을 직접 몇 번 읽어보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삼한 시절에 이삼한과 함께 했던 어떤 사람도 여래와 함께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러므로 '소연'을 포함하여 '실상학회 회원' 중에서 그러므로 '이삼한 시절의 이삼한'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인터넷에서 '이삼한 시절의 이삼한'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전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확실히 알지 못하는 말, 상상과 추측과 꾸며낸 것을 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를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쓴이는 1991년 8월 17일, 동대신동 달마원 강연회에서 여래를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달마원에 있던 몇 사람이 글쓴이에게 여래와 그 활동에 대해 소개를 했습니다. "여래는 이러 이러한 사람입니다." 그때 몇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여래와 그 활동에 대한 소개 말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그 결과 여래의 진실에 다가가는 일에 많은 시간과 세월을 허송했습니다.
이삼한과 여래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위선자(僞善者)입니다. 위선자(僞善者)란 자신보다 상위 수준의 사람을 적절히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려는 자를 말합니다. 이삼한과 여래의 이야기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사악(邪惡)한 자입니다. 사악(邪惡)한 자란 자신조차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남에게 퍼뜨려서, 불행한 자신과 함께 묶어 무지한 집단을 만들려는 자를 말합니다.
이삼한 시절의 이삼한이나, 여래 시절의 여래나, 사람은 같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일반 사람들이 그 진실을 알아보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삼한과 여래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이트와 글쓴이의 글마저 참고하지 말아주시기를 신신당부 드립니다. 「외로운 투쟁」「한탄」「나그네」「깨달음」
이삼한님이 깨달은 후에 어떤 스님과 대화하는 중에 반야심경을 들었는데 "그 자도 깨달은 자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라거나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무식한'이었다는 표현도, 여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래를 폄하하고 우롱하기 위해 만들어낸 억지 '소리'인 것 같습니다. 「외로운 투쟁」이나 「한탄」을 한 번이라도 건성으로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를 할 마음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만약「외로운 투쟁」이나 「한탄」을 읽어보았는데도 그런 '소리'를 한다면, 또는 모르는 지식을 머릿속에 너무 많이 쌓아두고 정신적으로 매우 위태로운 상태인 사람이 이해력도 부족하고 정신(精神)이 없어서 하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이삼한과 여래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은 분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절대 듣지 마시고, 네 권의 책을 직접 두서너 번 읽어보시기를 간곡히 권해드립니다. 「외로운 투쟁」이나 「한탄」을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시면, 이삼한은 학식(學識)과 실력(實力)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석·박사 분들의 학식(學識)이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학사·석사·박사의 코스를 이수했다는 '학력'뿐입니다. 일정한 코스를 이수한 '학력'이 실제 '학식과 실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한반도의 과거 역사와 현재의 위상을 세계 속에서 가늠해보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삼한은 대외적으로 자신의 '학력'을 '독학(獨學)'이라고 당당하게 내세웠습니다. 이삼한은 자신의 출중한 학식과 실력을 전부 조국을 위해 바치려고 애태웠습니다. 이삼한 앞에서 그 어떤 학력자·실력자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이삼한이 정말 '반야심경'을 몰랐을까요? 「외로운 투쟁」의 내용을 조금 인용하겠습니다. 염불을 외우던 중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물끄러미 막내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저 아이의 사주를 아십니까?」 어머니는 아이의 생년월일을 일러주며 늙은 중을 마루로 안내했다. 어디서 왔느냐는 어머니의 인사에 중은 쌍계사에서 나왔다고 대답을 했다. 얼마 동안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헤아리던 중은 또 한참이나 아이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넋이 빠진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은 왠지 동요한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던지 어머니가 입을 떼었다. 「어떠신지요?」 중은 씁쓸하게 웃으며 한참이나 있다가 말을 했다. 「저 아이를 우리 절에 맡길 수 없겠습니까?」 무엇 때문인지 중은 그런 말을 하였다. 어머니는 중의 그런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농담으로 받아 넘기는지 장남의 사주를 보아 달라고 졸랐다. 어머니의 성화에 중은 몇 마디 대답을 하였다. 얼마 후 자리에서 일어난 중은 대문 쪽으로 걸어가다 다시 막내를 바라보며 「큰 그릇이야.」 하는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남기며 다른 마을로 가버렸다.
눈앞에 <계룡산 갑사>라는 절의 현판이 들어온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걸친 나의 초라한 모습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눈앞에 선하게 보였다. 인자한 부처상의 모습이 나의 눈에 보였다. 부처상이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네 팔자를 몰라 이제 오느냐고 나무라는 것만 같다. 가방을 문 앞에 놓아둔 채 불상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2천원을 제단 앞에 놓고 절을 했다.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불상을 보며 나의 마음속으로 말을 했다. 나는 혼자 산을 오르며 등원암이란 암자가 나를 반겨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암자의 법당을 찾아 들어가서 불상 앞에 절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빌었다. 저의 앞날을 인도해 주옵소서. 500년 전에 세워졌다는 그 암자는 신도안 쪽을 향해 서 있었으며 그 암자에는 전설이 서려 있었다. 옛날의 절 이름이 압정사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오면서 300년 전부터 등원암이란 암자로 이름을 바꾸었고 당시 암자의 현판을 쓴 사람의 이름이 나의 이름과 같은 사람이란다. 오늘까지 이어온 절의 내력을 듣고 나니 신기한 마음마저 생겨났다. 단조로운 생활과 싸워 보는 외에 나에게는 산을 헤매는 버릇이 생겼다. 가파른 산의 능선을 넘으면 계룡산 골짝마다 간간히 초라한 토담집이 한 채씩 나왔다. 신자도 없는 유사종교의 교주라는 사람이 보이는가 하면 기인이 되겠다고 산신께 기도만 하는 사람, 신통력을 받겠다고 토담집에서 기거한지 10년이 되었다는 자칭 도인도 있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는 날이면 이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어울리면서 꽁꽁 언 계룡산의 겨울을 외롭지 않게 견뎌내려고 애썼다. 대전과 서울에서 왔다는 불공 손님을 만나는 날은 세상 이야기가 듣고 싶어 여자이건 남자이건 손님 옆에서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어느덧 절 생활을 한 지 50여일이나 지났다.
이삼한은 저를 낳으시고 고생만 하시다가 어릴 적 돌아가신 어머니의 회상에서, 어머니가 골칫거리 하나 없앨 절호의 기회에 저를 절에 보내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얼마나 고맙게 여겼을까요? 이삼한이 계룡산에서 50여일을 지내는 동안, 암자의 승려가 하루에도 여러 번 낭랑하게 염불하는 '반야심경'을 한 번도 듣지 못했고, 들었더라도 그 염불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반야심경'을 전혀 몰랐다고 치부한다면 참으로 부족한 이해력이 아닐까요? 이삼한은 계룡산에서 50여일을 지내는 동안, 자신의 출중한 학식과 실력, 타고난 친화력으로 계룡산 골짝마다 있던 사람들과 모두 가까워졌습니다. 이삼한도 여래도 승가(僧伽)에서 가장 많이 독송되는‘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성도 학식도 실력도 없는, 이 땅의 무지(無智)한 자들이 상상으로 말하는 낱말풀이 '반야심경 해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연'이 여래에게 '반야심경'의 자구(字句)를 읽었을 때, 여래가 놀란 모습을 보였던 것은 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 짐짓 크게 놀라는 척 했을 뿐입니다. ‘너희가 그런 내용을 그토록 대단하다고 오랫동안 여기고 받들어왔다면, 바로 내가 그곳에 있던 자이며, 바로 내가 그곳에서 온 자이며, 바로 내가 그 진실체이다. 눈 뜬 장님이여! 눈앞에 있는 나를 보라.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그곳이며, 내가 바로 그곳에 있는 자이며, 내가 바로 그자다.’ 여래가 진실을 보다 더 강하게 보여주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사정(事情)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래의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외로운 투쟁」에 나오는 이삼한의 절규(絶叫)입니다. “영혼은 자기를 구하기 위해 육신을 받아 세상에 태어났는데, 이 땅에 '고학력·고학식'을 가진 분이 있다면 이 문장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봐 주십시오. 이 땅에 '고학력·고학식'을 가진 분께서 과연 이런 문장을 스스로 쓸 수 있을까요? 만약 이런 수준의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학식과 실력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면
(주) 대접(待接) : 마땅한 예로써 대하는 것. 성인들이나 여래는 일반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수준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아내나 그 가족이라해서 성인이나 여래를 쉽게 인정하고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인들이나 여래도 사람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으니 가족이 있기 마련인데, 가장 가까운 혈육조차도 알아볼 수 없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매우 높은 수준의 의식체를 가진 분들이다. 어쩔 수 없이 성인이나 여래를 알아볼 수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그분들의 격에 어울리는 마땅한 예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현실 속에는 아무도 있지 못하다. 이와 같이 이해하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누구든지 쉽게 수긍할 수 있습니다. 장님들의 세상에서 눈 뜬 자가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외로운 투쟁」- 차례 19. 화려한 혼담 부터 끝까지 내용을 읽어보시면, 이삼한이 아내를 두고 쓴 문장이 수십 군데 이상 나열됩니다. 엉뚱하지만, 이삼한에게 아내가 없고,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내는 이삼한에게 유일한 최상의 반려자였습니다. 아내는 이삼한에게 유일한 최고의 조력자였습니다. 아내는 이삼한에게 유일한 최대의 후원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삼한에게 아내보다 더 소중하고 더 가깝고 더 고마운 사람은 없었지만, 그런 아내조차도 어느 날 이삼한이 여래로 출현하자 조금도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여래 이삼한은 남편 대접하기가 마뜩하지 않은 대상이었습니다. 여래는 아내가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이지만, 또 아내는 남편이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이지만, 아내는 여래와 사는 것을 조금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세상일은 잊어버리고 가정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 살기를 바랐습니다. 아내는 여래가 사람 찾는 일은 잊어버리고 아내와 함께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여래의 과거가 이삼한이었을 뿐, 이삼한은 여래로 출현하고 말았습니다.
글쓴이가 여래 곁에서 보았던 그 아내의 모습을 소개하겠습니다. -남편을 언제나 “여래님”으로 깎듯이 호칭했습니다. -'여필종부'에 버금할 정성으로 남편의 아내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굴지의 대기업 여사원 사우회에 수십 년간 맏언니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단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여래의 일반 강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주)
(주) 사모님께서는 저희 月刊 자연의 가르침 출판기념회에 자연과학연구학회 회장 부인으로 참석하셔서 역할을 다하셨으며, 여래의 특별 강연회에는 항상 참석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강연장을 마련하지 못해 떠돌 때는 자택에 사모님의 안방을 강연장으로 내주셨습니다. 사모님께 감사말씀을 그때그때 드리지 못하고 이처럼 공개된 장소에서 머리 숙여 사례인사를 드립니다. <도서출판 자연의 가르침>
<©도서출판 자연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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